"무(無)에서 유(有), 유(有)에서 뉴(New)"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 내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고, '유(有)에서 뉴(New)'를 발견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 '유(有)'에서 보다 새로운 '뉴(New)'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들에 대해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다채로운 관점이 필요했다. 내가 지금의 와기(WHAGI)를 만들기까지의 준비 과정은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살 무렵부터 미술을 배웠고 어린이집을 다녀오고 나서, 유치원을 하원하고 나서, 초중고등학교를 하교하고 나서는 미술 학원에서 그림을 그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 다녔던 미술학원 원장님의 조카분이 모 대학의 교수님이셨고 원장님의 추천으로 교수님의 개인 화실에서 형, 누나들과 함께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스케치북 우측 상단에는 그림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3가지 항목이 있었는데 태도와 표현력 그리고 창의성이었다.
처음 교수님을 뵈었을 때, 태도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었는데 명확하게 이해하기에는 어린 나이였지만 그림에는 마음가짐이 드러나기 때문에 연필을 잡기 전에 먼저 마음 가짐을 정돈하라는 내용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리고 서른이 넘은 지금, 여전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진정성있는 태도라 말한다. 혹자는 나를 냉소적인 사람으로 판단하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실은 솔직하거나 담백한 사람이다. 나는 사실 마음도 여리고 눈물도 많지만 다사다난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굳은살을 만들어 주어 조금 단단해진 지금의 내가 되었을 뿐이다. 나는 좋은 건 정말 좋다고 표현하지만 또, 싫은 건 명확하게 싫다고 표현한다. 솔직함도 진정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타인을 의식할 것 없이 무례하지 않은 선에서 자기 의견을 말하면 된다.
본론으로 돌아가 브랜드란 무엇인지, 좋은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는지, 그렇다면 디자이너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소양은 무엇인지에 대한 진심 어린 고민은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창의성의 정의에 도달했다. 나는 '디자이너란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어린아이처럼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또한 새로이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재미있는 일련을 과정을 거쳐 그것을 더욱 새롭게 만들어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매우 호기심 많은 성격이었고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했다. 만약이라는 여러가지 가설을 세우고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를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했던 것 같다. 세상엔 궁금한 게 너무나도 많은 탓에 항상 질문이 많고 또 생각도 많아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어린이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만약에를 외치고 있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재미있는 상상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현실로 구현해 내는 어른이 되었다.
내가 브랜드를 구상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디자이너는 다채로운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였고, 앞서 말한 것처럼 한 가지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도출해 낼 수 있고,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내가 고리타분한 성격이었다면 디자이너를 할 수 없었겠지만 다행히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무모한 상상력과 극도로 예민한 감각(The highly sensitive person)을 가진 괴짜스러운 면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디자이너라는 직업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브랜드를 기획하면서 다양한 디자인을 준비하는 것보다 다양한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시간을 쌓는데 더 노력해왔다. 10년이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전시를 관람하면서 느낀 일기장을 채워나갔고,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었다. 어쩌면 읽었다는 표현보다 경험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수도 있겠다. 나란 사람에게 가장 흥미로운 방법으로 관점의 방을 늘려가는 건 책을 통해 누군가의 삶이나 생각을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읽었다면 더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내 취향은 주로 인문학과 건축에 편향되어 있었고 그중에서도 동서양의 철학과 건축가들이 직접 써 내려간 서적은 잠시 동안 나를 그 사람들이 되게 했다. 이런 과정들의 쌓임은 내 안에 여러 개의 관점의 방을 만들어 주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입체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던 것 같다.
또한 나는 뭐든 관심이 생기면 아주 깊이 파고들어가는 악취미를 가졌다. 내가 잘 모르고 단순히 내 추측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나를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내 입을 거쳐 나오려면 누구보다 내가 가장 많이 공부하고 잘 알아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내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준전문가의 수준이 되어서야 끝맺음이 난다. 이런 지독한 경험들은 지식의 깊이를 깊게 파고 들어가게 하고, 깊이 있는 지식의 쌓임은 흥미로운 디자인을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곤 한다.